고대 그리스 천문학에 대하여

로마 시대에 가장 활발한 천문학 연구는 위대한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약 2세기)가 활동했던 알렉산드리아였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고대 서양 과학의 발전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의 책 덕분입니다. 불행하게도, 후대의 역사학자들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노인이 남긴 지식을 표절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심지어 그를 “완전한 사기”라고 혹평했다 실제 관측을 무시하고 객관적 현실과 어긋나는 우주론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관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이 모든 비방은 근거가 없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생애와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그는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로서 가치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대표작인 《알마게스트》에 수록된 최초의 천문 관측 기록은 127년, 가장 최근의 기록은 141년이다. 만약 이 기록들이 모두 맞다면, 그는 서기 1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는 또한 알마게스트 외에도 몇 권의 중요한 책을 썼기 때문에 165년에서 170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천문 관측을 했다는 것을 밝힌 유일한 지점은 알렉산드리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성인기의 대부분을 이 위대한 중심 도시인 헬레니즘에서 보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어떠한 과장도 없이, “알마게스트”는 단순히 천문학의 백과사전이다. 서양 고전 천문학의 권위 있는 책이자 그리스 수리 천문학의 결정체이기도 하며, 중세 아라비아 천문학과 르네상스를 통한 근대 유럽 천문학의 원천임에 틀림없다. ‘알마게스트’의 출간부터 뉴턴 시대까지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를 비롯한 모든 위대한 천문학자들은 ‘알마게스트’의 ‘우유’를 먹고 꾸준히 성장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이론에 반기를 들고 부분적으로 수정한 천문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이론”과 같이 이 시기에 출판된 모든 중요한 서양 천문학 책들도 “알마게스트”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마게스트>에서 우주의 구조 체계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이유를 제시했는데, 후에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프톨레마이오스 지구 센터 시스템”이라고 불렀다.”

그는 또한 모든 천체의 궤도는 ‘반드시’ 원형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원은 가장 완벽한 형태이고, 완벽한 우주에서 불완전한 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이유로 냉엄한 관찰을 무시하는 그런 행동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러한 이유로 후세인의 일부는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후 1,000년 동안 종교적 이념의 억압과 천문학적 관측의 한계로 인해 그의 이론은 서양 천문학의 주류 이론으로 널리 받아들여졌고, 케플러 시대가 되어서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알마게스트”에서, 그는 단순히 그의 이론과 관찰을 일치시키기 위해 모든 종류의 방법을 시도했다. 그는 먼저 이른바 ‘주력’ 모델을 선보였다. 그것은 그 행성에 의해 작동되는 작은 원형 궤도이다. 주 전원의 중심은 하나의 큰 원을 따라 이동하는데, 이를 ‘주 전원’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지구의 나머지 부분도 주동력을 갖게 되고, 이러한 주동력원의 중심은 ‘인간 피라미드 건설’처럼 주원 위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이 행성의 운동은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 된다. 그러나 그는 “왜 행성은 하늘에서 이렇게 달릴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여전히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유명한 프톨레마이오스 행성표에서 그가 관찰한 48개의 별자리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 중 페르세우스와 오리온자리는 여전히 현대 천문학에 있다. 그러나 별자리의 경계선은 조금밖에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가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천체의 최남단 별자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가 그것들의 이름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Leave a Comment